별의 Life

 

1. 병역특례에 대해 알기까지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 한다." 저도 이 말의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는 군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군대를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 무척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군대 가서 고생 한번 해보는 것도 좋다는 뭇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이왕 갈바 예야 아주 힘든 곳으로 가자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해병대입니다. 

 

해병대에 지원을 했더니 포항으로 오라고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과 함께 2001년 3월에 포항에 가게 되었습니다. 2001년 봄 포항의 바람은 차가웠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품에 안아주시고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잘 지내야 한다." 하시면서 아버지와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이 돌아간 후 선임병들의 입은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욕과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습니다. "입에 있는 옥수수가 몇 개 떨어져야 정신을 차리겠냐? XX새끼들아" "이 XX들이 대가리에 수박 물이 좀 떨어져야겠는데?"

저녁이 되어 목욕을 하라고 하는데 목욕시간을 1분을 주더군요. 그냥 물만 적시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 신체검사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불합격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무려 3일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니 형이 제 몸에서 냄새난다고 막 뭐라고 한 기억이 납니다. 이리하여 저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는 또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병역특례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래를 매우 잘하는 친구여서 당시에 저는 그 친구에게 잠시 노래 레슨을 받고 있었습니다.  "병역특례 하면 회사 다니면서 돈도 벌고 군대도 안 간다더라" 사실 IMF 때 가정의 경제가 무너져서 힘든 부분도 있었는데 저는 이 놀라운 정보에 깜짝 놀랐고 집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병역도 해결한다면 1석2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저런 제도가 있는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보니 신체검사 등급에 따라 현역이면 자격증을 따서 회사에 들어가야 하고 그 이하이면 그냥도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현역이었기 때문에 일단 자격증부터 따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자격증을 따야 하냐고 물으니 자신은 전기기능사를 취득했다고 하더군요.

 

 

 

 

 

 2. 전기기능사 취득하기

그래서 저는 전기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크게 어려운 것이 없었지만 독학을 하기에는 실기가 문제였습니다. 기능사 실기는 회로를 꾸미는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독학은 무리였습니다. 어쨌든 학원을 다녀서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2~3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전기기능사를 취득한 날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문의하니 합격하였다고 했습니다.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한국산업인력공단에 가서 저의 생애 첫 번째 국가기술자격증을 수령하였습니다.

 

2020/04/23 - [취업 및 자격증/전기] - 전기기능사를 따야 하는 이유

 

 

 

 

 

3. 병역특례 업체 취업하기

출처 - 조선일보

이제 취업을 해야 하는데 당시 시청에서 취업박람회를 한다고 해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인사담당자 한분이 저와 면담을 하고 1주일 정도 후에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라고 하더군요. 요즘에는 인터넷이 하도 발달되어 있어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4. 병역특례 생활

당시 사회경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병역특례 생활을 했지, 알았다면 아마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일했던 회사는 50인 이하의 매우 작은 기업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저와 같이 일하시는 분들은 조선족, 몽골인, 베트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3D(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이었습니다. 

 

첫째로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20~25kg짜리 화학제품을 약 1000개 가까이 포장했습니다. 

이런 걸 보통 큰 기업에서는 기계로 쌓고 포장할 텐데, 안타깝게도 제가 일했던 곳은 모든 것을 인력으로 했습니다. 보통 한국사람이 이곳에서 일하면 7일 안에 몸살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사라져 버리죠. 입에서 단내 납니다. 저 역시 4일 만에 몸살이 나서 계속할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신기하더군요 그 힘든 일을 하는데 1달~2달이 지나가니까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요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 자체가 기본적으로 힘이 안 들지는 않지만 최소한 몸살 나지는 않게 일하는 요령이 생겼습니다. 

 

둘째로는 더러운 일이었는데 플라스틱 첨가제를 만드는 곳이라 현장에 플라스틱 첨가제가 항상 날아다녔습니다. 길 건너 옆 공장 지붕에 우리 제품 파우더가 쌓일 정도니 이것들을 계속 조금씩 마시게 돼서 그런 것인지 1년 정도 다니니까 식사 후에 소화가 잘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OO공단의 화학단지다 보니 온갖 공장에서 나오는 나쁜 물질이 대기 중으로 올라갔다가 날씨가 흐릴 때 내려오곤 했지요. 특히 체류 가스 비슷한 눈 따가운 것이 내려와서 자주 고생을 했습니다. 하루는 대기 중에 무슨 물질들이 서로 합성이 되었는지 붉은 눈이 내리더군요. 당시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셋째로는 위험했는데 3년간 그곳에서 일하면서 사고 나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뜨거운 것을 얼굴에 맞은 분도 계시고 산성 성분의 화학물질을 맞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일하고 계신 외국분들도 무서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자주 갈구는 몽골 근로자 분의 동생이 놀러 왔는데 떡대에다 스티븐 시걸 머리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딱 봐도 주먹 좀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무서워서 몽골 근로자분을 못 갈구겠더군요.

 

또한, 제가 일한 회사가 매우 인색했습니다. 작업용 목장갑을 한 달에 4개를 주어서 모자라니 빨아서 사용했습니다. 방진마스크도 1주에 1개씩 주었는데 3일이면 마스크가 검게 변했습니다. 겨울이면 화학제품이 불에 잘 탄다고 난로도 없이 문 열어 놓고 일했습니다. 여기서는 내복과 군밤장수 모자는 필수입니다. 손이 얼어서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장갑 안에 비닐장갑을 끼고 일했고 손이 너무 시릴 때는 백열전구의 온기로 손을 녹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려 3년을 버텼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네요.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토요일은 오전을 일하고 월급이 80만 원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이라 하지만 물가를 고려하고 일의 고됨을 생각할 때 큰 금액은 아니죠.

 

 

 

 

 

5. 1달간의 군대 생활 - 8사단

출처-세계일보

병역특례도 4주간의 훈련을 군에 가서 받게 됩니다.  사실 너무 짧은 기간 동안 있어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네요. 훈련소 생활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격하고, 화생방 하고 훈련받습니다.

 

 

 

 

 

6. 병역특례 마치고 얻은 것

사실 몇 번이나 저곳에서 나오려고 했습니다. 병역 특례병들이 하도 갑질을 당하니 1년마다 업체를 한 번씩 바꿀 수 있도록 당시 법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저곳에서 결국 3년을 마치게 됩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너무 많이 했지만 그 시간이 꼭 헛되지만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게 얻은 것과 눈에 보이지 않게 얻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게 얻은 것은 역시 돈이죠. 당시 가세가 기울어서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집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또한 대학교 복학 시에 사용하였습니다. 집에 지원해주고 대학교 복학 시 1학기 등록금으로 사용하니 남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당시에도 등록금이 350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월급 80으로 350을 모으려면 무려 6개월이 걸립니다. 완전 생막일을 6개월 동안 그것도 거의 짠돌이처럼 아껴 써야 모으게 됩니다. 이때 저는 정말 크게 깨달았죠. '돈 버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그리고 고졸로 일반 회사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대학교에 복학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등록금이 아까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죠. 무조건 장학금을 타자고 결심하고 공부를 했고 대부분의 학기를 장학금을 타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정하고 처절한 사회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삶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너무 공부하기가 싫어서 학사경고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했던 적이 많았죠.

 

 

 

 

 

7. 병역특례 폐지에 대하여

그러나 이런 병역특례도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폐지될 전망입니다. 위 자료는 이공계 병역특례 폐지에 대한 국방부의 계획입니다. 안타깝지요. 특히 박사과정에 있는 고급두뇌들이 군대에 가버린다면 그동안 쌓았던 지식에 찬물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병역특례를 생각하시고 계신 분들은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병역특례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저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혹시나 병역특례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참고해주시고, 모든 병역특례들이 다 저렇지는 않다는 것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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